Search
Duplicate

러셀 서양철학사/ 이슬람교 문화와 철학

이슬람교의 기원 헤지라(Hegira, Hijra)는 622년에 일어났으며 무하마드는 10년 후 사망.
그가 죽은 직후 아랍인은 정복을 시작하여 엄청난 속도로 정복사업을 이어감.
무하마드가 세운 종교는 정교한 삼위일체설이나 육화 신학으로 뒤얽히지 않은 단순한 일신교였음.
무하마드는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않았고, 그를 따르던 신도들이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못하게 했음.
그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유대인의 풍습을 부활시켰으며 포도주 사용도 금지했음.
신자들의 의무는 이슬람교의 확장을 위해 가능한 한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이행하는 일이었으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유대교나 조로아스터교도 쿠란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 부른 ‘성서의 백성(people of the book)’을 박해하지 않았음.
아랍 제국은 전제군주국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칼리프는 무하마드의 후계자로서 신성한 성품을 대부분 물려 받았음.
칼리프의 지위에 오르려면 명목상 선출의 절차를 밟아야 했으나 곧 세습제로 바뀜.
아랍인은 새로운 종교의 이름으로 세계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지만, 종교심이 깊은 종족은 아니었음. 아랍인이 정복을 시작한 동기는 종교가 아니라 약탈과 재물 때문.
소수의 이슬람교 전사가 큰 어려움 없이 고도의 문명과 낯선 종교를 겸비한 다수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광신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
페르시아인은 일찍부터 종교심이 깊고 사색의 수준이 높았는데, 페르시아인은 개종한 다음 이슬람교로부터 예언자 무하마드와 그의 동족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더욱 종교적이고 더욱 철학적인 종교를 만들어 냄.
661년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가 죽은 뒤 이슬람교도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뉨. 수니파가 더 큰 종파이고, 시아파는 알리를 계승함.
페르시아인은 오랫동안 시아파에 속함.
이슬람교 철학자인 아비세나는 선대 이슬람교 철학자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 가까웠고, 신플라톤 학파와는 멀어졌음.
그는 후에 그리스도교 스콜라 철학자들처럼 보편자 문제에 몰두함.
아비세나는 아베로에스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반복해 사용한 공식을 고안 함. “사유가 형상들의 일반성을 만들어낸다.”
그는 유, 즉 보편자가 동시에 사물 앞에도, 사물 안에도, 사물 다음에도 존재한다고 말 함.
유는 신의 지성 안에서는 사물 앞에 존재한다. 자연계의 물체 안에서는 사물 안에 존재한다. 우리의 사유 안에서는 사물 다음에 존재한다.
아베로에스는 신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던 아랍인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바로 잡는데 관심을 가졌음.
그는 마치 교주 대하듯 아리스토텔레스에 존경을 표함.
아베로에스는 신의 존재를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견해이기도 함.
영혼 불멸에 관해서도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보이며, 영혼은 불멸하지 않지만 지성은 불멸한다고 주장함.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인격의 영혼 불멸을 보장해주지는 못하는데, 지성은 다른 인격들 안에 나타나더라도 같기 때문.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이러한 아베로에스의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 분투함.
아베로에스는 엄격한 정통 신앙을 고집하지 않음.
당시 철저한 정통 신학자들로 구성된 종파에서는 모든 철학이 신앙에 해롭다고 선언하며 반대했는데, 아베로에스는 <파괴의 파괴>라는 책을 집필하여 응수함.
아베로에스는 종교란 비유 형태로 철학적 진리를 포함한다고 생각함.
아베로에스는 이슬람교 철학보다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더 중요한 인물.
이슬람교에서 그는 발전의 끝을 의미했으나, 그시르도교에서는 발전의 시작을 의미함.
아랍 철학은 독창적인 사사응로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아비세나와 아베로에스는 본래 주석가였음.
전성기 이슬람교 문명은 예술과 여러 방면에서 기술이 경탄할 만하지만, 이론적인 문제에서는 독자적인 사색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 함.
그러나 문명의 전달자로서 갖는 이슬람 문명의 중요한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