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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반항이자 신학적 반항이었음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면서 교황이 천국 열쇠의 권능으로 요구하던 조공을 더는 바치지 않음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남.
반종교개혁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자유에 맞선 반항
그래서 교황의 힘이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한편, 교황의 권위가 보르자 가문이나 메디지 가문의 안이하고 태평스러운 방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백해짐.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남.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세 인물이 루터, 칼뱅, 로욜라.
세 사람 모두 지적인 면에서 보면 철학 안에서는 중세에 속하는데, 그들 직전에 활동한 이탈리아인들이나 에라스무스와 모어 같은 사람들과는 대조를 이룸.
종교개혁이 개시된 다음 이어진 세기는 철학의 관점에서는 불모의 시대였음.
루터와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으로 되돌아갔는데, 그의 가르침 중에서 영혼과 신의 관계를 다룬 부분만 존속시키고 교회에 관한 부분은 배제했음.
그들의 신학은 교회 권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함.
그들은 미사를 올리면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구원받는다는 교의와 대사 교리를 거부함. 대사가 남발되면서 거두어들인 금품이 교황청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운명 예정설로 인해 사후 영혼의 운명은 사제의 대사 행우와 아무 관계도 없어짐.
이러한 혁신 사상은 교황권에 맞선 투쟁을 도운 반면, 가톨릭 국가에서 가톨릭 교회가 강하듯이 개신교 교회가 개신교 국가에서 강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됨.
개신교 신학자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가톨릭 신자들만큼 고집불통이었지만, 힘이 더 약했기 때문에 해악을 덜 끼침.
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부터 개신교도들 사이에는 종교 문제에 국가가 미치는 권력을 두고 분열이 일어날 조짐이 있었음.
루터는 군주가 개신교도인 나라에서 군주를 교회의 수장으로 기꺼이 인정함.
이로서 기존의 왕권을 강화하던 경향에 가속도가 붙었음.
그러나 종교개혁의 개인주의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한 개신교도들은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만큼이나 왕에게 복종하는 것도 무척 꺼렸음.
개신교는 처음에 놀라우리만큼 급속한 성공을 거두지만 주로 로욜라의 예수회 창설을 계기로 성공가도에서 걸림돌을 만남.
로욜라는 군인 출신이었기에 수도회도 군대식으로 조직했는데, 수도회 총장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예수회의 일원은 모두 이교도에 맞선 싸움에 참가할 각오를 해야 했음.
예수회 수사들은 수도생활로 잘 단련되었으며, 유능한데다 대의에 투신하는 능숙한 선동가들이기도 했음.
그들의 신학은 개신교도들의 신학과 정반대였는데, 그들은 성 아우구스니투스의 가르침 가운데 개신교도들이 강조한 요소를 거부했음.
그들은 자유의지를 확고하게 믿었으며 운명 예정설에 반대했음.
구원은 신앙 하나만이 아니라 신앙과 종교적 행위가 합쳐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회 수사들은 선교에 대한 열의, 특히 극동 지역에서 수행한 선교를 계기로 신망을 얻었음.
그들은 고해신부로서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는데, 이교도에는 예외지만 다른 성직자들보다 더 너그럽고 관대한 편이었음.
그들은 교육에 전력을 기울여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음.
신학상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때면 언제나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배우지 못할 수준 높은 수학을 데카르트에게 가르친 자들도 바로 예수회 수사들이었음.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결과는 처음에는 지성계 전반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으나 종국에는 유익한 편이었음.
30년 전쟁으로 개신교도나 가톨릭교도 가운데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승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게 되었음. 그래서 교리의 통일을 바라는 중세적 소망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기본 교리를 생각하는 자유를 키우는 결과로 이어졌음.
신학상의 싸움을 혐오하게 되면서, 유능한 사람들은 세속 학문, 특히 수학과 과학에 점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
16세기는 루터의 등장 이후 철학적인 면에서는 불모의 시대였으나, 17세기에는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났으며 그리스 시대 이후 가장 괄목할만한 진보를 이루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