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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암흑기의 교황 체제

교황 체제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부터 실베스테르 2세에 이르는 4세기 동안 영고성쇠를 거듭함.
8, 9세기에 의욕이 넘치는 교황들은 절호의 기회를 잡아 교황 권력의 전통을 형성해 나감.
교황들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롬바르드족 군대의 힘으로 그리스 황제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함.
그리스의 교회는 대체로 황제에게 복종하고, 황제는 주교나 총대주교를 임명하고 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함.
수도자들은 황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했고 이 때문에 교황의 편을 들었음.
반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들은 황제에는 복종하였지만, 교황의 권위에는 복종할 생각이 없었음.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리된 주된 원인은 동방 교회가 교황의 지배권에 저항한 사건.
7세기에도 황제의 군사력이 로마를 지배했기 때문에 교황들은 복종하거나 수난의 길을 걸어야 했음.
751년 롬바르드족이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수도 라벤나를 점령함으로써 교황은 그리스 황제들에게 의존하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남.
롬바르드족이 739년 로마 정복을 꾀하자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원조를 요청하고 위기를 벗어남.
처음부터 주교들은 모두 동등하다고 생각했으며 동방에서도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여져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동방에는 다른 총대주교들이 있었던 반면, 교황은 서방의 유일한 총대주교였음.
동방과 달리 서방의 속인들은 대부분 수세기 동안 읽고 쓸 줄 몰랐기 떄문에 서방 교회는 여러 이점을 누림.
황제의 특권은 교황의 특권에 대적할 정도였지만, 서방의 군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교황에 견줄만한 특권을 누리지 못함.
샤를마뉴는 롬바르드족을 완전히 물리치고 왕으로 인정 받은 다음 로마에서 교황이 거행한 대관식을 통해 황제로 즉위함.
이는 황제와 교황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음.
사를마뉴는 자기 주장의 합법성을 교황으로부터 이끌어냄. 이로써 교황과 황제 사이에 이상한 의존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로마 교황의 대관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황제가 될 수 없었던 반면, 황제는 교황을 임명하고 폐할 권리를 주장함.
샤를마뉴 죽음 이후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고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한 초기 상황은 교황 체제에 유리하게 작용함.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이전 어느 때보다 교황 권력을 강화함.
그는 동방과 서방의 황제들,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나라의 주교단과 다퉜는데 거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함.
10세기 내내 로마의 지방 귀족들이 교황직을 장악하였는데, 그 무렵까지 교황의 선출 방식을 정하는 규칙은 존재하지 않았음.
서기 1000년은 이슬람교도와 북방 야만족이 서유럽 침략을 중단했다는 이유로 전환점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