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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선은 행복이며 행복은 영혼의 활동이라고 주장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영혼을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눈 것에 동의한다.
그는 비이성적인 부분을 생장 부분과 욕구 부분으로 나눈다.
욕구 부분은 욕구가 추구하는 선이 예컨대 이성이 허용하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이성적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덕에는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이 있다고 주장. 지적인 덕은 가르쳐서 얻고,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키워서 얻는다.
시민들이 좋은 습관을 길러서 선량하게 하는 일이 입법자의 의무라고 주장.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워지며, 다른 덕들도 행동함으로써 얻게 된다.
강제로라도 좋은 습관을 들이면 때에 맞추어 좋은 행동을 할 경우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함.
아리스토렐레스는 중용을 강조.
어느 덕이나 양극단은 악덕이며 그 가운데의 중용을 가져야 한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고, 후함은 방탕과 인색함의 중용이며, 긍지는 허용과 비굴의 증용이고 기지는 익살과 상스러움의 중용이고 겸손은 수줍음과 파렴치함의 중용이다.
다만 중용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덕이 있는데 진실성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도덕적 견해들은 그가 살던 당시의 관례에 속했다.
노예제를 찬성함.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가장 훌륭한 개인은 그리스도교의 성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가장 훌륭한 개인은 적당한 긍지를 가져야 하며, 자신의 공적을 낮추어 평가해서도 안 된다. 경멸받을 만한 사람은 누구든 경멸해야 한다.
최고 덕이 소수를 위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윤리학을 정치학에 논리적으로 종속시키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윤리학의 목표가 선한 개인이 아니라 선한 사회라면 그 선한 사회는 종속 관계를 포함하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이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선한 개인이 아니라 선한 사회. 그래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각자의 계급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인 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목적, 말하자면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으로 받아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쾌락이란 말은 행복과 구별되지만, 쾌락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행복은 유덕한 행동에 달려 있고, 완벽한 행복은 최선의 활동인 관조에 달려 있다.
관조가 전쟁이나 정치나 다른 어떤 실천 경력보다 더 나은 까닭은 삶에 여유를 주기 때문이며, 여유는 행복의 본질적 요소이다. 실천적인 덕은 이차적인 행복을 제공할 뿐이다.
이성을 발휘해야 최고 행복에 이르게 되는 까닭은 이성이 다른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때문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러셀의 평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대체로 자기모순이 없는 일관된 저작이다. 선이 행복이며, 행복은 결과가 좋은 활동에서 얻게 된다는 학설을 짜임새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모든 점에서 자신의 형이상학과 모순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취향과 우리 시대의 윤리를 비교해 보면, 훨씬 현대화된 정서에 맞지 않는 불평등 관계를 수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는 자비나 박애라 부를 만한 요소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초기 철학자들에게 발견되지 않는 정서적 빈곤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