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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2000년 동안 그에 필적할 만한 철학자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만큼이나 무소불위의 지위를 누렸다.
때문에 철학 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진보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었음.
17세기가 시작된 이래 지성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거의 모든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논리학의 경우 이런 경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의 교수처럼 글을 쓴 첫 인물이다. 그가 쓴 논문은 체계를 갖추어 토론 내용이 항목별로 분류되어 있다.
플라톤에게 스며들었던 오르페우스교의 요소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희석되어 상식이라는 강력한 요소와 혼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색채를 나타내는 곳에서는 누구나 그가 받은 가르침으로 인해 타고난 기질이 압도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종교에 기울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상세한 서술이나 비판의 측면에서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기초의 명확성이나 티탄의 광휘가 부족하기 때문에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는데 실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어떤 논점에서 설명할지 결정하는 일은 어렵지만, 가장 설명하기 좋은 지점은 플라톤의 이상 이론을 비판하고 보편자 이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상식으로 희석된 플라톤 사상이라고 묘사해도 괜찮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플라톤 사상과 상식이 쉽게 섞이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보편자’라는 용어는 여러 실체를 서술하는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개별자’란 용어가 그 속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고유명사가 나타내는 대상은 ‘실체’인 반면, ‘인간답다’나 ‘인간’ 같은 형용사나 집합명사가 나타내는 대상은 ‘보편자’라 부른다.
실체는 ‘이것(this)’ 이지만, 보편자는 ‘이러한 것(such)’에 해당하므로, 현실의 개별(particular)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종류를 가리킨다.
보편자는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보편 명사이든 실체를 나타내는 이름이 되지는 못할 듯 하다. 왜냐면 각 사물의 실체는 그 사물의 고유한 것으로서 그 밖의 어떤 사물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자는 사물 하나 이상에 속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물들에 공통된 무엇이다’
다시 말해 보편자란 홀로 실존할 수 없고, 특정한 사물들 속에만 존재한다.
(러셀의 말)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을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자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 이론은 플라톤의 이상 이론에서 한 단계 진보한 이론이라 확신하며, 철학의 진정한 문제를 다룬 매우 중요한 이론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를 추종한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용어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본질(essence)이다.
본질은 결코 보편자와 동의어가 아니다. 당신의 본질은 ‘당신이 바로 당신의 본성에 따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이다.
본질은 당신의 속성들 가운데 당신 자신이 아니게 되지 않고서는 잃어버릴 수 없는 속성들이며, 개별 사물뿐만 아니라 종도 본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종의 정의는 그것의 본질을 언급해야만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 논점은 ‘형상(form)’과 ‘질료(matter)’의 구분이다.
대리석은 질료지만 조각가가 틀을 잡은 모양은 형상이다.
그는 형상의 효력으로 질료는 어떤 한정된 사물이 되기 때문에 형상이 그 사물의 실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육체의 형상이라고 주장. 영혼이란 육체가 목적과 통일을 이루어서 ‘유기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특징을 지닌 한 사물이 되도록 만드는 실체라고 주장.
형상이란 질료의 일부를 통일하는 무엇이며, 이러한 통일은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목적론과 일치되는 듯 하다.
한 사물의 형상은 그 사물의 본질이자 제일 실체라고 한다. 보편자는 실체가 아니지만, 형상들은 실체들이다.
모든 사물이 다 질료를 갖지는 않는다. 영원한 사물들도 존재하는데, 이 영원한 사물들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사물들을 제외하면 질료를 갖지 않는다.
사물들이 형상을 얻게 되면 현실성이 증가한다. 말하자면 형상을 얻지 못한 질료는 가능태일 따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 이론은 가능태(potentiality)와 현실태(actuality)의 구별과 관계가 있다.
맨 질료(bare matter)는 형상의 가능태이다. 그러니까 변화란 모두 변화된 후에 해당 사물이 이전보다 더 많은 형상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화’라고 부를 만하다. 형상을 더 많이 지닌 존재는 ‘현실성’을 더 많이 지녔다고 생각한다.
신은 순수 형상이자 순수 현실태이다. 그러므로 신 안에서는 결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학설은 낙관론과 목적론을 포함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와 우주 안의 만물은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쪽으로 계속 발전한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은 흥미롭고 형이상학의 나머지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사실 ‘신학’은 우리가 ‘형이상학’이라 부르는 학문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르는 명칭이다.
그는 실체에는 세 종류, 곧 감각되고 소멸되는 실체, 감각되지만 소멸 하지 않는 실체, 감각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째 부류에는 식물과 동물이 포함되고, 둘째 부류에는 천체가 포함되며, 셋째 부류에는 인간의 이성혼을 비롯한 신이 포함된다.
신을 지지하는 주된 논증은 제일 원인 논증이다. 말하자면 운동의 기원이 되는 무엇이 존재함이 틀림없고, 이 무엇 자신은 운동해서는 안 되며, 영원한 실체이자 현실태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욕망의 대상과 사유의 대상이 바로 이렇게 자신은 운동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은 사랑받는 존재이기에 운동을 일으키지만, 운동을 일으키는 다른 온갖 원인은 당구공처럼 스스로 운동함으로써 작용한다.
신이 순수 사유인 까닭은 사유가 지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도 신에게 속한 까닭은 사유의 현실태가 생명이고 신이 그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또 신이 자기 힘에 의존하려는 현실태는 가장 선하고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이란 살아 있는 영원한 존재이며 가장 선하기 때문에 생명과 지속은 계속 영원히 신에게 속한다. 이 존재가 바로 신이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에서 영원하기에 운동하지 않고 감각되는 사물과도 분리된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신은 이러한 실체로서 크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부분이 없고 나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또 신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며 변할 수도 없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왜냐면 다른 변화는 모두 장소가 변한 다음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신이 생각하는 사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야 하기에 신의 사고는 사고에 대한 사고이다’
‘신은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로 정의될 수 없다’
아리스토테렐스는 원인에는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의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함.
현대의 용어법에 따르면 ‘원인’이라는 말은 작용인에 한정되고 부동의 원동자는 목적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니까 부동의 원동자는 변화가 향하는 목적을 제공하며, 변화는 본질적으로 신과 닮아가는 진화로 나타난다.
신은 영원히 순수 사유로서 행복, 즉 완전한 자기충족의 상태에 있어 실현되지 않은 목적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이와 반대로 감각 세계는 불완전하지만, 불완전한 생명, 불완전한 욕망, 불완전한 사유에서 비롯된 염원을 드러낸다.
모든 생물은 정도가 크든 작든 신을 의식하기에 신에 대한 염원과 사랑으로 활동하며 신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신은 모든 활동의 목적인이다.
변화는 질료에 형상을 부여할 때 일어나지만, 감각 사물이 관련된 경우 질료라는 기체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신만이 질료 없는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세계는 등급이 더 높은 형상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신과 더 많이 닮은 단계로 계속 진보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완성되지 못하는 까닭은 질료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는 탓이다.
이것이 진보와 진화의 종교인데, 바로 신의 정적인 완전성(static perfection)은 유한한 존재들이 신을 느끼는 사랑을 통해서만 세계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수학에 기울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에 기울었다. 이러한 차이가 바로 그들이 제시한 종교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육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윤회설을 조롱한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하는 듯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정신을 구별하는데, 정신이 영혼보다 등급이 더 높아서 육체와 맺는 관계가 덜 밀접하다고 이야기 한다.
정신은 우리의 일부로서 수학과 철학을 이해한다. 정신의 대상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정신 자신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영혼은 육체를 움직이고 감각 대상들을 지각하는 존재이다. 영혼은 자가 영양, 감각, 느낌, 원동력(motivity)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정신은 더 수준 높은 사고 기능으로 육체나 감각기관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은 불멸하지만 영혼의 다른 부분은 불멸할 수 없다.
(러셀의 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설을 이해하려면,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며 공간을 차지하는 모양이 ‘형상’의 한 종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영혼의 본질적 특징은 육체의 ‘형상’이 됨으로써 육체를 단일체로서 목적을 가지는 유기적 통일체로 만든다.
영혼은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비이성적인 요소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살아 있는 만물에서 심지어 식물에서도 발견되는 생장과 모든 동물에게 있는 욕구이다.
만약 이성이 인간보다 신성하다면, 이성에 따르는 삶은 인간적인 삶보다 신성하다.
비이성적인 면은 우리를 분리하고, 이성적인 면은 우리를 통합한다. 따라서 정신 또는 이성의 불멸은 분리된 인간 개인의 불멸이 아니라 불멸하는 신의 일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영혼 불멸을 믿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인간이 이성을 지니는 한 불멸하는 신성에 참여한다고 믿었을 따름이다.
자신의 본성 속에 깃들인 신성한 요소를 늘리는 일은 인간에게 열려 있으며, 신성한 요소의 증대가 바로 최고 덕이다.